이 글은 2019년 10월 20일에 작성되었습니다.
맺을 결(決), 마음 심(心)
세계 일주를 결심하는 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생을 크게 바꿀 결심치 고는 말이다. 딱 5일을 고민했고 그중 4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들어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가벼운 불면증을 겪었다.
희망적인 상상(설렘) → 현실 직시 → 비관 → 희망적인 상상(설렘) → 리스크 감지 → 비관
이런 상승과 하강 패턴의 무한 반복이었다. 마음은 이미 내일이라도 비행기를 타는 기분이었고 상상만 해도 설렜다. 그럴 때마다 현실과 리스크를 직시하며 그 마음을 억눌러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여행을 떠나는 건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았다.
결심하고 나서 지금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확실히 '판단'이라기보다 '결심'이 더 옳은 표현 이리라.
맺을 결(決), 마음 심(心).
이 한 단어에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 생각된다.
© 2021. Am Morgen. CC BY-NC-SA 4.0.
떠나는 이유 찾기 시작
우리 부부는 거의 10년 가까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 여행하고 일 년 안에만 돌아오면 비자가 유지되므로 다시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대장님은 이젠 일본 생활이 질린다고 말했다. 일본 중에서도 드라이한 성향을 가진 삿포로에서 외로움도 많이 탔고 겨울이 길어 눈도 많고 춥고 일조량도 극히 적다 보니 많이 우울해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가족의 품이 그리워지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의 활기찬 분위기가 대장님에겐 더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시국도 한몫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 적대적인 우익 성향이 강한 분들이 실권을 잡고 있고, 일본의 정치적 상황상 쉽게 반전이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그분들의 정책이 일본에서 평생을 살기에는 고민이 되는 부분도 많았다.
일단 여행 = 일본 생활 정리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과제가 늘어나고 고민은 더 깊어졌다. 이미 우리는 일본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구축해두기도 했고 노후까지 착실히 준비하고 있어서 귀국이라는 건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해서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떠날 운명인 건지 하나 둘 평소에 대수롭지 않던 것들도 떠날 이유가 되기 시작했다.
고민과 결심(자기 합리화)
- 집 지으려던 계획
일본에서 10년 거주 시 영주권 신청이 가능해지고 영주권이 있으면 일본인과 동일한 조건(저금리)으로 장기 대출이 가능해진다. 마침 10년을 채운 시기였고 영주권 신청과 집 지을 땅과 건축사무실을 알아보던 상황이었다. 몇 달간 발품을 팔며 알아보던 상황이었지만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내 집이 있으면 마음의 안정은 얻겠지만 이동이 힘들어질 것이고 대출을 받게 되면 그 대출을 갚기까지 자유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좋은 집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넓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탄다고 행복하진 않았다. 신혼 때 회사에서 제공한 작은 사택에서 지냈던 것이 아직도 나에겐 좋은 추억이고 행복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적어도 반년은 버틸 수 있는 최소 생활비만 남기고 모아둔 돈을 모두 여행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 한국 나이로 30대 후반. 다녀오면 일은 어쩌지?
여행이 짧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경력에 공백이 생긴다. 어딘가에 취직하기 위해선 이 상황을 설득력 있게 포장해서 설명해야 하리라. 하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쉴 새 없이 달려왔고 일에 대한 열정도 많이 잃은 것이 사실이다. 열정을 되살릴 계기로 삼고 싶었다. 개발에 당분간 거리를 두고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생각했다. 지금의 조건과 대우는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자유를 얻는 대가라 생각하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 다른 일은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일본에서 준비한 노후
국민 연금, 후생 연금, 401k, 생명&건강 보험 처리가 고민이었다. 국민 연금, 후생 연금은 도중에 탈퇴를 하면 지금까지 넣은 금액의 일부만 반환이 되는 문제가 있었고, 401k는 아예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보험은 그대로 소멸될 예정이었다. 몇 푼 건지지도 못하고 다 사라진다는 현실에 본전이 생각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버릴 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노후? 물론 큰 걱정이다. 하지만 답이 없는 것 같다. 미래의 안정을 땡겨쓴 벌이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때 행복한 길은 그때 고민하려 한다. - 생활 기반 정리
사실 제일 엄두가 안나는 일중에 하나다. 생활 기반이 모두 여기에 있다 보니 정리할게 너무 많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했는데 단순히 생각하니 너무도 단순해졌다. 여행 캐리어 하나만 들고 빈손으로 들어온 일본이니 빈손으로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바로 자리 잡을 것도 아니었기에 손을 가능한 한 가볍게 해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걸 처분하기로 했다. - 가족과 친지 설명&설득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린 외국에 살아서 양가 부모님이 별 걱정을 않으신다. (가까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사실 설득을 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었다. 그냥 설명이 적당할 것 같았다. 어차피 10년 전에도 우린 그렇게 일본으로 왔으니까.
© 2021. Am Morgen. CC BY-NC-SA 4.0.
'세계일주 결심'
'세계일주 후기'
'세계일주 후회'
'부부 세계일주 결심'
'부부 세계일주 후기'
'부부 세계일주 후회'
를 키워드로 검색을 많이 했었다. 생각보다 우리와 같은 고민을 거쳐 실행에까지 옮긴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단히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정말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지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대신해드림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실행까지 옮기지 못하신 분들은 글을 남기지 않으셨을 테니 그분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으시리라. 사실 왜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는지, 어떤 점을 고민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셨기에 안 가셨는지가 더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번 계획을 계획대로 진행했든 도중에 계획을 바꾸든 어떤 결과가 되든 그 모든 결과를 이곳에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포기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결론
결론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포기에 가깝다. 그래서 결국 결심인 것이다.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무서움이 엄습해 온다. 마냥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에겐 건강한 몸이 있고 최소한의 여유자금도 만들어 두고 떠날 계획이다. 나름 향후 대책과 대안도 몇 가지 생각은 해뒀다. 결국 간다고 마음을 먹으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두려움과 무서움보단 설렘이 더 커진 게 사실이다.
여행을 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지금과 같은 생활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다녀오면 다른 일을 할 것 같기도 하다. 내 생각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갈지 나도 기대가 된다.
대략 세워 본 계획
- 2020년 3~5월 중 퇴사 (1, 2개월 전까지 회사엔 비밀)
- 퇴사 후 1개월간 일본 정리 & 홋카이도 여행 그리고 귀국
- 2개월간 정비
- 2020년 6~8월 중 여행 시작
모든 것이 순탄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하며 가볼 생각이다. 파이팅!
'세계일주 > 결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합리화 두번째 - 세 가지의 커리어 (0) | 2021.05.20 |
---|---|
자기합리화 첫번째 - 요즘 나는 (0) | 2021.05.20 |
세계 일주 한번 할까? (0) | 2021.05.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