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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결심

세계 일주 한번 할까?

by 추쿠아비 2021. 5. 20.

이 글은 2019년 10월 5일에 작성되었습니다.

2019년 9월 25일의 일이었다.

노란색 SNS를 통해 앞날에 대해 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대장님으로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제안이 나왔다.

 

"다 접고 싹 다 정리해서 세계 일주나 한번 할까?"

 

하지만 내 첫 반응은 반대였다. 안 되는 이유부터 먼저 떠올랐다.

 

"경력 끊기면 취직은 어쩌려고?"
"갔다 와서 집도 절도 없이 어쩌려고?"
"준비도 없이 갔다 와서 뭐 해 먹고살려고?"

 

심각한 번아웃에 빠져있었고 무슨 일이든 일단 안 되는 이유부터 찾는 습관이 생겼었다. 무엇이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먼저 상상하고 포기해버리는 안 좋은 습관이었다.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번아웃

난 삿포로로 이직하기 전 직장에서 건강을 해칠 정도로 열심히 일했었다. 내 역할 이상의 일까지도 내 커리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희생했었다. 그 희생은 상상하기도 힘든 격무가 필요했고 조직은 이를 근성이 강하고 성실하다고 평가해주었다.

난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있었다. 희생은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하면 성공에 다가가는 것인 줄 알았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면 상사로부터 칭찬받아 보람을 느꼈고 금전적 보상으로도 돌아와 만족감을 느꼈었다. 내가 우리 조직에선 꼭 필요한 존재고, 나와 관련된 업무는 내가 중심일 거라는 거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건강을 크게 해쳐 쓰러지기도 했었다. 쓰러진 다음 날 무리해서 회사로 빠르게 복귀했고 직장에서 근성의 화신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바쁘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점점 짜증과 분노가 늘어 갔다. 주위가 방해물로 느껴질 정도로 만사가 예민했었다.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던지고 퇴근해서 내가 한 말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내 인격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고 느끼는 나날이었다.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주위를 닦달하고 짜증을 내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더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 빠졌다. 조직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불만만 하고 본인에게 문제가 있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입원 전에 친한 지인에게 큰 사기를 맞아 모아둔 돈은 물론 빚까지 지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크게 상처를 받았었다. 그렇게 강제로 내 일상은 정지되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내 생각과는 다르게 회사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갔다. 오히려 내가 없어서 현장은 여유가 생기고 활기도 감도는 것 같았다. 크게 깨닫게 되었다.

 

'뭔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해 이유도 없이 달렸구나!'

 

번아웃 상태에 빠졌고 정말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복귀하기는 했지만 껍데기만 남은 채 자리를 지키는 기간이 길었다. 더는 이곳에 있다간 정말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직을 결심했다. 이직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었다. 오롯이 나와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다.

 


by Unsplash.


누구에게나 인생 노잼 시기가 온다

하지만 이직도 내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 주지는 못했다. 업무도 스마트 해졌고 분위기도 좋고 생활도 안정적이었다. 그대로 남들처럼 저축하고 돈을 모아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아가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끝이 보였다고 할까?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것, 지금부터 내 능력과 노력으로 얻어 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지금 하는 것과 앞으로 해야 할 것. 10여 년을 구르다 보니 어느 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 인생에 반전이 있을까? 오싹했다.

 

"지금이 편하긴 한데 뭘 하든 재미가 없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루하루가 똑같네. 내일도 똑같을 거 같고 내년도 똑같을 것 같고 십 년 후에도 똑같을 것 같다. 이대로 이십 년, 삼십 년 후에 행복한 게 정말 의미가 있으려나? 아니 정말 행복하긴 하려나?"

 

답이 없는 대화의 반복이었다. 대장님도 다름이 없었다. 나와 동갑인 대장님은 비슷한 시기에 사회에 나와 비슷하게 일 해왔고 결혼 후에는 짜증만 가득한 내 옆에서 참고 기다려줬다. 많이 지쳤으리라.

왜 그렇게 달려왔던 걸까. 주위에 상처를 주고 주위를 힘들게 하면서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고쳐지질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극심하게 지쳐있고 작은 일에 예민해지고 사소한 것에 짜증을 냈다. 뭐든 새로운 걸 하면 의욕이 생길까 평소에 해본 적 없는 것들을 하나씩 해봤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것과 필요 때문에 하는 건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세계 일주

그 말의 여운은 참 길었다. 한번 듣고 나니 내내 생각 끝에 걸렸다. 계속해서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다.

어릴 땐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방바닥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사회과 부도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삼촌이 가져다 놓은 '세계진문기담', '세계 상식 백과', '20세기 대사건들'을 읽으며 내가 이 역사적인 현장에 가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했던 것들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설렌다.

 

"근데 막상 생각하니까 설레긴 한다. 주판 한번 놔보고 다시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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